[박근혜 시대]18대 대통령 박근혜…'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섰던 그가 이제 5년 간 '대한민국호'를 이끌게 됐다.
박근혜는 1997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정치인생 초기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여성이라는 점이 큰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의 딸로 일찍이 청와대에 들어가 정치를 경험했다.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서거한 이후에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며 아버지의 정치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1979년 10·26 발생까지 18년 동안의 청와대 생활은 그에게 애국과 애민의 가치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만드는 시기였다.
그는 인생의 멘토와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는 그에게 '명(明)'이자 '암(暗)'이었다. 유신독재 등 과거사를 둘러싼 논란은 줄곧 그의 발목을 잡았고, 그의 '불통'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럼에도 그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가 아버지가 서거한 뒤의 심정을 '피묻은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아냈다'고 표현한 것처럼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기자회견에서는 "국민들께서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며 "저도 대통령을 아버지로 뒀기에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고 이해를 구했다.
논란이 잦아들지 않자 지난 10월26일 아버지의 33주기 추도식에서 그는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며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를 국민들께 돌려드리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지만 '아버지와 거리두기를 한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번 대선을 통해 대통령 박근혜에게 전 대통령 박정희의 존재는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대상이 됐다.
그는 이번 대선 전날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돌봐야 할 가족도 자식도 없다. 오로지 국민 여러분이 저의 가족이고 국민의 행복만이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라며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 한 분 한 분의 삶을 돌보는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며 "국민 여러분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동행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 5년 간 그가 아버지 시대의 상흔을 얼마큼 치유하고,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그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지난 달 25일에는 이번 대선에서 패배할 경우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모든 걸 걸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고 한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저의 정치여정을 마감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이제 5년 후 역사의 판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10세 소녀, 운명이 바뀌다
박근혜는 1952년 2월2일 경북 대구 삼덕동의 한 셋방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35세였던 아버지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 제1정보과장이었고, 27세의 어머니 육영수는 옥천의 대부호 '육종관'의 딸이었다. 2세 때 서울로 이사를 와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6세이던 1958년 그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다 10세가 되던 1961년 5월16일, 그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아버지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제5대 대통령이 됐고, 박근혜는 대통령의 딸, 영애(令愛)가 됐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평소 검소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 육영수가 자녀들이 특권의식을 갖게 될까봐 신당동 외할머니 댁에 맡겼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성심여중 재학 시절에도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박근혜가 애국애족, 원칙과 신념 등을 보고 배운 것도 이 시기다.
학창시절 그는 어머니의 옷을 줄여입을 정도로 검소했고, 아이들을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근혜와 성심여중·고 동기동창생인 박봉선(60) 씨는 지난 2일 첫 대선후보 TV토론 찬조연설에서 "대통령 딸 도시락이니 근사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리쌀 섞인 잡곡밥이라 솔직히 실망했었다"며 "가난을 이겨내려고 국민에게 보리혼식을 권장했던 당시 보리쌀이 반쯤 섞인 밥에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대통령의 딸도 나하고 똑같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했다"고 회상했다.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던 박근혜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전자공학과에 들어간다. 그는 "젊은 시절에 '내가 전자공학도가 돼서 전자산업의 일꾼으로서 우리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택했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공부가 상당히 어려워 열심히 했다. 밤늦게까지 실험 결과를 기다린다고 11시 넘어서까지 있었다"며 "화학용품이 튀어서 스타킹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대학 4년 간 평균 학점이 4점 만점에 3.82점의 성적으로 수석 졸업했다.
◇22살의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10·26
교수라는 부푼 꿈을 안고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근혜의 운명은 또 한 번 뒤바뀌었다. 박근혜는 1974년 8월 친구들과 여행 중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육영수가 8·15 광복절 경축식에서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수만 볼트의 전기'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찌른 듯한 통증'으로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
귀국 후 박근혜는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해 5년 간 '퍼스트레이디'를 지내며 아버지의 정치를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다. 이 시기 박근혜는 청와대 직원들의 보고를 빠짐없이 메모해 '수첩 공주'의 자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를 보좌하는 동안 대통령으로서 아버지의 막중한 책임감과 인간적인 고뇌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박근혜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이른바 10·26 사태로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당시 그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은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길로 박근혜는 동생들을 데리고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고, 이 시기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생계비 명목으로 받은 6억 원이 논란이 되자, 그는 이번 대선 TV토론에서 '나중에 사회에 다 환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근혜는 양친을 모두 잃은 당시 경험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행복한 가정을 보면 그렇게 좋아보인다. 그래서 지켜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18년간의 야인(野人)의 삶
'공주'에서 순식간에 '야인'이 된 박근혜는 18년 간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한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람들은 내가 평생 대통령의 딸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부모님을 잃고 27세 때부터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 가슴이 뻥 뚫린 채로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그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는 등 부모의 유지 계승에 전념했다. 육영재단과 영남재단, 정수장학회, 영남대 이사장 등을 맡기도 했다.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두고는 동생 근령과의 갈등으로 1990년에 물러났고, 정수장학회는 2005년에 현 최필립 이사장에게 넘겼다.
박근혜는 이 시기의 어려움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으로 해소했다. 그는 "제가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려고 수필을 많이 썼다"면서 "내 마음을 풀어내는 거다. 제가 쓴 글 중 하나를 지금도 읽어보면 '내가 그런 글을 썼구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다보니 여러 루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5년 전 대선 경선에서는 '최태민 목사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루머까지 제기돼 그는 "애가 있다면 데리고 와라. DNA 검사까지 해주겠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5선의 정치인…위기 때마다 '구원투수'
박근혜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1997년 IMF 위기 때다. 그는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에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개인 자격으로는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박근혜의 정치적 토양은 당에 크고 작은 위기가 생길 때마다 당을 구해 내며 단단해졌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발휘된 그의 위기 극복 능력은 그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2004년 3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16대 대선 당시 대선자금 수사로 이른바 '차떼기 당'의 오명을 뒤집어썼을 뿐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따른 역풍까지 맡으면서 대 위기를 맞았다. 당시 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당사를 전격 이동해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했고, 천막당사 출범 당시 눈물의 TV 방송으로 사죄해 121석이라는 기적을 이끌어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오세훈 전 서울시장 지원 유세에 나선 그는 서울 신촌에서 커터칼 테러를 당해 60바늘을 꿰매야 했다. 그가 수술 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당시 열세에 있던 대전 지역의 선거 결과를 뒤바뀌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홍준표 전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중앙선관위의 디도스 공격 파문 등으로 사퇴하자 당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나서며 올 4월 19대 총선을 전두지휘했다. 김종인·이상돈 교수 등 외부 비대위원을 전격 영입하고, 당명과 당색, 당헌·당규까지 바꾸는 쇄신을 이끌면서 152석을 획득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정책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끝까지 반대해 부결시키는 등 '여당 속 야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0여년 동안 의원 5선을 이뤄내면서 그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강단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5년 전 못 이룬 대권의 꿈
박근혜는 16대 대선과 17대 대선에서 두 차례 대권에 도전했지만 매번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며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2000년 정계 입문 2년 만에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되면서 일약 스타정치인으로 부상한 그는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대세론'에 크게 반발하며 당내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002년 3월 탈당을 선언한 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그 해 11월 한나라당에 재입당했고, 2004년 3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다.
17대 대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당내 경선을 벌였다. 이 시기 박근혜는 이명박 당시 후보와 경선 룰(규칙) 및 시기를 두고 첨예한 갈등을 벌이다가 중재를 위해 강재섭 당시 당 대표가 내놓은 중재안을 거부하며 칩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에서 그는 이 후보의 BBK 주자조작사건 의혹과 위장전입 의혹 등을 제기하며 네거티브 공방을 심화시켰다. 8월 당 경선을 치른 결과, 일반당원과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이 후보를 앞섰지만 여론조사에서 뒤지면서 1.5%P 차로 아깝게 패했다.
당시 박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자"며 이 후보에게 축하를 보내 '아름다운 승복'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지지를 요청해온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게 '정도가 아니다'라며 경선 승복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8대 공천에서 친박계 대부분이 공천을 받지 못하자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며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첫 여성 대통령 향한 대권 레이스
2012년 7월10일 대선 출정식, 8월20일 경선 승리로 박근혜는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후보가 됐다. 후보가 된 지 120여 일만에 12월19일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직에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과 김성주 성주그룹회장 등 외부인사와 비박계인 정몽준 전 대표 등을 임명했고,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총괄선대본부장에 선임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에게는 공약 개발을 담당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직을 맡겼다. 정치쇄신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안대희 전 대법관을 영입해 정치쇄신 행보를 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 '동교동계' 핵심이었던 김경재 전 의원 등을 캠프에 영입함으로써 '국민대통합' 행보에도 주력했다.
'여성대통령'과 '민생대통령' 등을 강조하며 22일 유세 기간동안 1만km 이상을 달리며 선거운동을 펼쳤다.
12월19일 대선일까지 야권 단일화 바람과 과거사 발언 논란, 친박(친박근혜) 2선 퇴진론,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의 결별설, 야권의 네거티브 공세, 고(故) 이춘상 보좌관의 사망 등 크고 작은 고비를 겪었다.
단일화 바람과 야권의 네거티브 공세에는 각종 유세와 기자회견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했고, 친박 2선 퇴진론 등으로 당내 위기감과 갈등이 고조되자 최경환 전 비서실장의 사퇴에 이어 '김무성 카드'를 통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줄곧 발목을 잡아왔던 과거사 논란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 입장을 표명했지만,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등에 대한 발언 논란 문제가 더 부각되면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그는 이번 대선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하던 15년 전부터 자신을 보좌한 고(故) 이춘상 보좌관과 김우동 홍보실장이 강원도 유세 도중 교통사고로 숨지자 그는 두 차례 장례식장을 찾아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이 보좌관의 발인식에서는 여러 차례 눈물을 쏟으며 고인을 추모했다. 같은 날 사고로 며칠 뒤 숨을 거둔 고(故) 김우동 홍보실장의 빈소에서도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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